1903년(메이지 36년), 이해 일본에서는 국내 최초의 영업 버스가 교토 시내를 달렸고, 멀리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
같은 해 시마네현 이와미 지방에서 태어난 이와타니 나오지는 열두 살이 되자 오다의 농업학교에서 공부하며, 다윈의 '진화론'으로부터 적자생존, 우승열패의 냉엄한 현실을 배웠고, 훗날의 기업 이념인 '세상에 필요한 것이야말로 번성한다'라는 원칙을 머릿속에 새겼다. 이것이 그의 평생에 걸친 원리 사상이 된다.
그는 한 세기를 살았다.
그 존재는 '역사'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이기도 했다.
열다섯 살,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도야마에서 일어난 쌀 소동에서 비롯된 방화 사건을 고베에서 마주쳤고, 스무 살 때는 요코하마에서 간토 대지진(사망자 99,000명, 행방불명 43,500명)을 겪었다.
스물일곱 살에 창업한 나오지의, 산소 가스 판매를 주목적으로 한 기업의 꿈이 부풀어 가는 한편, 시대는 만주사변, 이어지는 상하이 사변으로, 군국주의가 일본을 집어삼켜 간다.
그러던 쇼와 9년(1934년), 완전히 무너지거나 떠내려간 가옥이 4만 호에 이른 무로토 태풍이 덮쳤다. 나오지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진주만 공격과 함께 시작된 태평양 전쟁.
중국 상하이, 톈진, 오사카를 넘나드는 장사는 목숨을 건 것이었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오사카에서 종전을 맞았다.
13만 호를 태워 버린 오사카 대공습으로 두 번이나 집을 잃으면서도 재기를 이룬 나오지는 1953년(쇼와 28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전국 규모로 프로판가스를 가정용 연료로 판매하기 시작한다.
사심도 욕심도 없는 이타의 정신이 그 원점에 있었다.
그가 꿈꾸었던 가스 에너지 사업의 인류 사회에 대한 공헌은, 도쿄 올림픽 성화대의 성화로 타올랐고, 1986년·1994년에 발사된 일본 최초의 국산 H1(1호기), H2(1호기) 로켓의 발사를 지켜봄으로써 이루어졌다. 성화에는 그가 이름 붙인 마루이 프로판이 쓰였고, H1, H2 로켓의 연료인 액화수소는 이와타니 그룹이 공급한 것이었다.
그 역사적 순간에 함께한 나오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내 자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기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프로판가스를 가정용 연료로 보급하는 데 힘쓴 것도, 여성을 부뚜막의 그을음에서 해방시키고 싶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였다. 수소 가스의 실용화를 향한 노력도 이와타니의 슬로건 '살기 좋은 지구가 이와타니의 소원입니다.' 그대로였다. 수소 에너지가 꿈의 무공해 에너지라는 데 그는 누구보다 일찍 주목하고 있었다. 사업과 자기 자신이 직결되어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에너지와 환경이라는 큰 스케일의 시야에 서서 한 세기를 살아 내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 너머의 미래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를 따른 것은 자신의 그림자뿐이었을까.
지금, 시대는 겨우 그를 따라잡으려 하고 있다.
2005년 7월, 이와타니 나오지는 조용히 그 '생'을 마쳤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꿈은 인류 보편의 순환 사상이 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 준다.